詩가 있는 풍경

Ⅰ. 부처님의 환시

미스터 규니샘 2016. 7. 25. 22:17


지금부터 30년전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공원에서 바둑과 장기로 세월을~.hwp


Ⅰ. 부처님의 환시


지금부터 33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공원에서 바둑과 장기로 세월을 보냈던 내 젊은 날에 어떤 연유로 산 속 암자에서 만난 스님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자 합니다. 나는 76년도 대학을 입학하여 중간에 집안사정으로 휴학, 군 복무를 마치고 81년에 복학하여 83년 초에 졸업을 하였다. 졸업한 해에 바로 취업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여러 군데 취업 자리를 알아보다가 허탕을 치고 내가 살던 소도시의 공원에서 노인들과 장기나 바둑으로 하루하루 힘든 시기를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때는 1983년 한 여름 7월 말쯤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갓 군에서 제대한 고교 동기와 함께 바람도 씌울 겸 지리산 등산을 가기로 하고 그 다음 날, 친구와 같이 2박3일 등산을 갔다. 지금은 지리산 야영장 비박이나 산장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였지만 30여 년 전에는 그냥 산을 타다가 머물고 싶은 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 되었다. 

중산리를 거쳐 법계사, 천왕샘을 거쳐 천왕봉을 찍고서 지금은 다 사라진 고사목 지대를 스쳐 지나 장터목, 잔돌고원(세석고원)에서 텐트를 쳤다. 밤 이슥하도록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미래를 이야기하였다. 별들은 손에 잡힐 듯이 내려앉았고 주변에 놀러 온 다른 일행들이 치는 기타소리에 세석고원의 야생화마저도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우린 세석에서 자주 다녔던 거림골행을 벗어나 그 동안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가보고자 음양수(세석산장 조금 밑)에서 대성동-의신- 쌍계사 길을 타기로 하였다. 세석에서 의신까지는 20여리의 가깝지 않은 길 이었다. 우리는 음양수를 출발하여 대성동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얼마쯤 내려가다 天竹의 일종인 山竹이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천죽은 2-4미터 높이로 마디가 있고 가늘고 곧으며 보통 어른 손가락 굵기로 줄기에는 댓잎이 없다가 꼭대기에 대 이파리가 달려 있으며 중간 마디마다 누른 껍질이 붙어 있는 산죽으로, 어른 어깨 넓이만큼의 등산로 위로 양쪽에 늘어섰는데 앞 사람이 지나가면 윗부분이 오므려 져서 십여 미터 지나가고 나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우린 

그런 길을 산꾼처럼 헤치며 나아갔다. 중간 중간에 산 사나이들이 미리 매어 놓은 눈높이쯤의 리본을 따라 걷기도 하였는데 어느새 우린 그걸 놓쳐서 간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계곡과 능선을 타기도 하였고 다람쥐와 놀기도 하면서 10여리를 걸어갔을까 뭉게구름 높이 떠 있고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주변이 사위어 갔다. 이윽고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떡갈나무 넓은 잎을 치더니 소낙비가 쏟아졌다. 천둥과 번개가 엄습했고 우린 혼비백산하여 내달렸다. 오른쪽 대성동 쪽을 가야하는 길을 왼쪽 석문을 통과 삼신봉으로 향하였다. 내삼신봉을 거쳐 쇠통바위와 항아리 모양의 독바위, 상불재를 지날 무렵 멈췄던 여름 소나기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또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였다. 우린 큰 바위 밑에서 잠시 쏟아지는 비를 피하다가 궐련을 나눠 피우며 거친 숨을 가라 앉혔다. 옷은 다 젖어 있어서 정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선 깔깔거리며 웃어재꼈다.  그 웃음이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 조금 후에 일어 날 불행을 미리 알지 못했다. 상불재에서 불일폭포 쪽을 향해 가며 조그만 계곡을 건너다가 그만 친구가 발을 헛디뎌 떠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놀라서 같이 뛰어가 친구를 잡으려 하다가 놓치고 또 잡으려 하다가 놓치기를 여러 번,  나 역시 계곡물에 빠지고 말았다. 계곡의 물속에서 주저앉았다가 일어서고 물살에 떠밀려 이리 저리 내려가다가 겨우 구사일생으로 계곡의 물살을 벗어나니 우리 두 사람의 등에 있어야 할 배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온 몸엔 멍이 들고 차가운 계곡물에 휩싸였으니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설상가상 주변 산자락은 어둑어둑 앞길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여름 소낙비는 멈췄지만 우린 길을 여러 번 찾지 못하고 헤매다 기진맥진, 깜박이는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며 인가를 찾아 내려갔다. 한참을 산죽을 뚫고 내려가니 조그만 암자가 있었고 불빛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지붕을 산죽으로 엮은 두 칸 정도의 집이 있었는데 우리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오십 중반의 늙수그레한 스님께서 나오셔서 우리를 맞이하였고 간단한 요기 거리를 차려내어 우리의 배를 채우게 하였다. 그리곤 우린 따로 달린 독채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젊은 청년과 함께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다. 고시 공부하는 정씨라는 청년은 여러 번의 고시 시험에서 1차 합격만 여러 번, 2차에 가서 낙방을 한 관계로 다음  번의 합격을 위하여 맹렬 정진하다가 “우리가 잠시 같이 자도 되겠느냐” 고 하자,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냐” 하며 들어오라고 하였다. 30촉 백열 전등아래 서로 통성명을 하며 당시의 젊은이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비밀스런 광주이야기와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이야기의 주제가 암자에 계신 스님에게로 옮겨 갔다. 그 고시생은 저 스님은 쌍계사 말사에서 거하면서 아이들을 거두어 키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스님의 과거를 이야기하였다. 그 스님은 실상은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서 10년의 징역형을 받아 살다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6년을 살고 나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스님에 관한 것을 털어 놓기 시작하였다. 그 스님은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하루는 친한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오랫동안 마시다가 그 친구와 언쟁을 벌렸는데 술이 취해 홧김에 포장마차의 식칼을 빼앗아 친구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친구 집에 가보니 주변에 들려오는 소문엔 친구부인은 그 길로 몇 년을 아이들을 위해 고생하다가 아이들을 시가 늙은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돈 벌러 간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그 시어머니마저 병들어 죽자 주변 사람들이 친구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겨 버렸다고 한다. 그 고아원을 찾아 아이를 수소문 하니 고아원 관계자가 말하기를 한 3년 고아원 생활하다가 도망을 쳐서 그 뒤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전해 듣고 스님은 자신의 단 한 번의 실수로 친구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크게 뉘우치며 그 길로 쌍계사로 들어와 행자 생활을 거쳐 중이 되었다고 한다.

우린 그 이야기를 고시생으로부터 들으며 한 사람의 운명이 참 기구하구나하며 서로 한탄하였다. 달빛이 암자의 들창문을 타고 넘어 우리 머리맡에 다가와 처연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곤 밤 부엉이 소리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으면 꿈나라로 향하였다. 


이튿날, 참으로 깊은 잠을 자고서 늦게야  일어나 소박한 절밥을 먹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우린 암자를 나서기 시작하였다. 인사를 하고 가려 하였으나 스님은 출타를 하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시 청년에게 대신 고맙다는 말 전해 달라하고 친구와 나는 숲 속 길을 걸어 나아갔다. 한 참을 갔을까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가까이 가보니 얕은 계곡에서 아이들이 등목을 하고 있었는데 초등 사 오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엎드려 있고 밀짚모자를 쓴 스님이 하얀 박 바가지로 물을 떠서 아이들의 등을 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으로 연신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을 훔치면서 깔깔거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스님은 인자스럽게 웃음을 머금고 계셨다. 그 때 스님이 쓰고 계신 밀짚모자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내려앉았다. 계곡의 물비늘은 반짝거렸고 그 때 그 풍경 속에 나의 영혼이 빨려들어갔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스님을 통해서 부처님의 환시를 보았다고나 할까.


그 뒤,  쌍계사에서 몇 리나 떨어진 00중학교에 미술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때 깔깔거리던 절집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은 몇 년 이후의 일이었다.


2015. 10.  이명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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